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전능하신 하나님은 곧 예수님의 재림이다.
    동방번개 책/그리스도의 말씀 2019. 8. 22. 19:10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중화 대륙, 다시 말해 홍콩, 타이완 동포들이 말하는 내륙에서 말씀이 육신 되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땅에 올 때는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은밀히 재림한다는 참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와서 오랫동안 역사하고 생활하였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렀어도 여전히 아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이는 영원히 ‘수수께끼’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으로 온 것을 사람은 아무도 알 리가 없다. 영이 역사하는 기세가 얼마나 크든, 하나님은 시종 아무 내색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내막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 단계 역사가 천계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사람은 누구나 다 볼 수 있지만 인식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이 끝나게 되면 모두 긴 꿈속에서 깨어나 평소와 완전히 다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번에 육신으로 온 것은 마치 범의 굴에 들어간 것과 같다.”라고 말씀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으로 와서 역사할 뿐만 아니라 큰 붉은 용이 군거하는 곳에 강생하였기 때문에, 이번에 땅에 온 것은 더더욱 엄청난 위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직면하게 되는 것은 총칼과 몽둥이고, 직면하게 되는 것은 시험이며, 직면하게 되는 것은 만면에 살기등등한 사람 무리여서 언제든 피살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진노를 지니고 왔지만 그는 와서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한다. 즉, 와서 구속 사역을 잇는 제2부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 단계 사역을 하기 위해 하나님은 노심초사하였고, 온갖 방법으로 시험의 공격을 피하였으며, 비미은장하며 자신의 신분을 전혀 자랑하지 않았다. 예수가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하였는데, 그는 구속 사역을 완성하러 온 것일 뿐,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사역은 절반만 마무리된 것이다. 구속 사역을 다 끝낸 것은 전체 사역 계획의 절반만 완성한 것이다. 새 시대가 시작되고 옛 시대가 멀어져 갈 때, 아버지 하나님은 그의 제2부 사역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그의 제2부 사역을 예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전에는 아마 말세에 말씀이 육신 되리라고 예언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이 이번에 육신으로 오는 것을 더욱 은밀히 하기 위하여 기초를 다진 것이다. 만인이 다 새벽이 왔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날이 이제 막 밝아 올 때, 하나님이 땅에 와서 그의 육신의 생애를 시작하였는데, 그 시각의 도래를 사람은 전혀 모른다. 아마 사람들이 다 깊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고, 아마 깨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고,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이미 땅에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는 것은 사역을 더 순조롭게 전개하기 위한 것이고, 더 좋은 사역 효과를 위한 것이며, 또 시험을 더 많이 피하기 위한 것이다. 봄잠에 동이 틀 때는 하나님의 사역이 벌써 끝난 것이다. 그는 땅을 떠날 것인데, 땅에서 유랑하며 기거하던 생애를 끝마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 친히 하고 친히 말씀해야 하고, 사람이 개입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크나큰 고통을 감수하며 땅에 와서 친히 역사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는 사역을 대표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은혜시대보다 몇천 배나 더 큰 위험을 무릅쓰고 큰 붉은 용이 군거하는 곳에 임하여 자신의 사역을 하는데, 노심초사하며 이 무리 빈궁한 백성들을 구속하고, 거름 더미 속에 있는 이 무리 사람들을 구속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모를지라도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커다란 유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극악무도한데, 어찌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에 와서 늘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극도로 참혹하든 하나님은 그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하늘 아버지의 더 큰 부탁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있을 뿐이다. 너희들 가운데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안 적이 있는가? 어느 누가 아들보다 더 아버지 하나님의 부담을 생각하는가?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은 항상 걱정하고 있고, 땅에 있는 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항상 간구하며 애태우고 있는데, 어느 누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겠는가? 어느 누가 아버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사랑하는 아들의 마음을 알겠는가? 하늘과 땅으로 헤어져 있기 아쉬워 언제나 아득히 멀리서 마주 바라보며 영 안에서 뒤따른다. 인류야! 언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겠는가? 언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겠는가? 아버지와 아들은 본래 서로 의지하는데, 굳이 하늘 위아래로 갈라놓을 필요가 있겠는가? 아버지가 아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은데, 굳이 애타게 기다리며 간절히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 비록 헤어진 날이 오래되지 않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아버지가 얼마나 오랫동안 애타게 바라며 기다리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분은 관찰하고, 그분은 조용히 앉아 있으며, 그분은 기다리고 있는데, 다 사랑하는 아들이 빨리 돌아오기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멀리 떨어져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언제 상봉하겠는가? 비록 상봉하면 영원히 함께하겠지만 아버지가 어찌 수천의 날 동안 하늘 위아래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견딜 수 있겠는가? 땅에서의 몇십 년은 하늘에서의 몇천 년과 같은데, 어찌 아버지 하나님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땅에 와서 사람과 똑같이 인간 세상의 창상을 다 겪고 있다. 하나님은 본래 무고한 분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에게 사람과 똑같은 고통을 받으라고 하는가? 그러기에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이처럼 절박한 것도 이상할 것 없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것은 아주 많지만,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마음에 충분히 보답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하나님께 바친 것은 너무나 적다. 하나님이 어찌 이로 인해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은 사람의 소질이 너무 낮고, 영의 감각이 매우 마비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역을 모두 본체만체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수성(獸性)이 언제 발작할지 몰라 하나님은 늘 마음을 놓지 못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땅에 오는 것에는 크나큰 시험이 있다는 것을 더 잘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만재(滿載)하고 사람에게 그의 뜻을 조금도 숨김없이 전부 알려 주었다. 그가 이미 이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려고 뜻을 정하였기 때문에, 고난이든 시험이든 다 외면한 채 조용히 자신의 사역만 하고 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되면 사람도 하나님을 알 수 있으리라 굳게 믿고, 하나님께 온전케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금 누가 하나님을 시험하든, 누가 하나님을 오해하든, 누가 하나님을 원망하든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이 영광 중에 임할 때, 사람은 하나님이 행한 것이 다 인류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다 인류가 더 잘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안고 왔으며 위엄과 진노를 가지고 왔다. 하나님이 사람을 떠날 때는 이미 영광을 얻었으므로, 영광과 귀환의 기쁨을 만재하고 떠난다. 땅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사람이 어떻게 저버리든 하나님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사역만 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세한 후 몇천 년의 역사(歷史) 동안 땅에 와서 수없이 역사하며 인간의 저버림과 훼방을 다 겪었는데, 아무도 하나님의 오심을 환영하지 않고 그저 냉정한 눈길로 대하였다. 이 험난한 몇천 년 동안, 사람의 행위가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였어도,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람의 패역을 보지 않고 따로 계획을 세워 사람을 변화시키고 정결케 한다. 하나님은 육신으로 와서 조소, 훼방, 핍박, 환난, 십자가 고통, 사람의 배척 등등의 이런 것을 이미 충분히 체험하였다. 육신으로 온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고난을 겪을 대로 다 겪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은 오래전부터 차마 볼 수 없어 머리를 들고 눈을 감고 사랑하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다만 사람이 모두 말을 잘 듣고 순복하며, 그의 육신 앞에서 몹시 부끄러워하고 그를 거역하지 않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바랄 뿐, 일찍부터 사람에게 더 높은 어떤 것을 바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치른 대가가 아주 크지만 사람은 오히려 근심 걱정 없이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역사와 진입 (4)>에서 발췌

    예수님[사진제공 동방번개(전능신교)]

    『하나님의 첫 번째 성육신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는데, 이는 그가 하려는 사역과 관련이 있다. 은혜시대는 예수의 이름을 기점으로 하여 시작된 것이다. 예수가 직분을 시작할 때는 성령이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기 시작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그를 믿는 사람이 한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한 것이었고, 사역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 구약의 율법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주로 한 사역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 뒤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 이상 여호와라 부르지 않고 예수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성령은 예수의 이름을 위주로 하는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데도 사람이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계속 율법시대의 사역으로 맞추어 본다면, 그것은 규례에 맞추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지나간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냐? 너희도 알다시피 지금은 이미 말세가 되었는데, 예수가 오면 설마 여전히 예수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앞으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알려 주었는데, 그가 왔을 때, 결과는 메시아라고 불리지 않고 예수라고 불렸다. 예수는 자신이 다시 올 것이고 간 그대로 온다고 하였다. 예수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분명하지만, 너는 예수가 어떻게 갔는지를 보았느냐? 예수가 흰 구름을 타고 갔다고 해서 여전히 친히 흰 구름을 타고 사람들 가운데 오겠느냐? 그러면 계속 예수라고 불리지 않겠느냐? 예수가 재림할 때는 벌써 시대가 바뀌었는데, 계속 예수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설마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로만 불러야 한단 말이냐? 설마 더 이상 새 시대에 새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단 말이냐? 단 하나의 ‘사람’ 형상과 하나의 특정된 이름이 하나님의 전부란 말이냐? 하나님은 시대마다 새로운 사역을 하고 새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가 어찌 서로 다른 시대에 같은 사역을 할 수 있겠느냐? 그가 어찌 낡은 것을 지키겠느냐? ‘예수’, 이 이름은 구속 사역으로 인해 불린 이름인데, 말세에 예수가 재림할 때에도 이 이름으로 불릴 수 있겠느냐? 또다시 구속 사역을 할 리 있겠느냐? 여호와와 예수는 하나인데, 왜 서로 다른 시대에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겠느냐? 그것은 사역하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냐? 단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부를 다 대표할 수 있겠느냐? 그러기에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이름으로 시대를 바꾸고, 이름으로 시대를 대체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이름도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대표할 수 없고 시대성을 띤 하나님의 성품만 대표하기 때문에, 사역을 대표할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적합한 이름을 하나 택하여 전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 여호와 시대든 아니면 예수 시대든 다 이름으로 시대를 대표한 것이다. 은혜시대가 끝나고 마지막 시대가 도래하여 예수도 이미 왔는데, 그가 어찌 또 예수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그가 어찌 또 예수의 형상으로 사람들 가운데 올 리가 있겠느냐? 너는 예수가 나사렛 사람의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너는 ‘예수’가 인류의 구속주일 뿐이라는 것을 잊었느냐? 그가 어찌 정복하고 온전케 하는 말세의 사역을 담당할 리가 있겠느냐? 예수가 흰 구름을 타고 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어찌 흰 구름을 타고 사람들 가운데 와 여전히 예수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그가 정말 흰 구름을 타고 온다면 사람이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있겠느냐? 그러면 온 천하에 그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유대인의 모습일 뿐이고, 또한 영원히 바뀔 수도 없다. 예수는 간 그대로 온다고 하였는데, 너는 그 말씀의 참뜻을 아느냐? 설마 그가 너희에게는 알려 주었단 말이냐? 너는 그가 흰 구름을 타고 간 그대로 온다는 것만 안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 자신이 도대체 어떻게 역사할 것인지를 아느냐? 만약 정말 너에게 볼 수 있게 한다면 예수가 했던 “말세에 인자가 다시 올 때는 인자 자신도 모르고 천사들도 모르고 하늘의 사자들도 모르고 모든 사람이 모르며 오직 아버지, 즉 영만 아시느니라”라는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네가 알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다면 이 말씀은 물거품이 되지 않겠느냐? 인자 본인도 모르는데, 네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직접 보게 된다면 그 말씀은 물거품이 되지 않겠느냐? 예수는 당시에 어떻게 말하였느냐?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날이 올 때는 인자 자신도 모른다. 인자라 하면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을 가리키는데, 정상이고 평범한 사람이다. 그 자신도 모르는데, 네가 알 수 있겠느냐? 예수는 자신이 간 그대로 올 것이고, 올 때는 자신도 모른다고 하였는데, 너에게 사전에 알 수 있도록 하겠느냐? 그가 돌아오는 것을 네가 볼 수 있겠느냐? 이것은 웃기는 소리가 아니냐? 하나님은 땅에 한 번 오면 이름을 한 번 바꿔야 하고, 한 번 오면 성별을 바꾸고, 형상을 바꾸고, 사역을 바꿔야 한다.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므로 중복 사역을 하지 않는다. 그가 이전에 왔을 때 예수라고 불렸는데, 이번에 와서도 계속 예수라고 불리겠느냐? 그가 이전에 왔을 때 남성이었는데, 이번에 와서도 여전히 남성이겠느냐? 이전에 왔을 때 은혜시대의 십자가 사역을 하였는데, 이번에 와서도 여전히 사람을 구속하여 죄악에서 벗어나게 하겠느냐? 또 십자가에 못 박히겠느냐? 그렇게 한다면 중복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냐? 너는 하나님이 항상 새롭다는 것을 모르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영원불변하다고 하는데, 그 말도 맞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이 영원불변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의 이름이 바뀌고 사역이 바뀌었다고 하여 그의 실질이 바뀌었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다. 이것은 영원불변한 것이다. 네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역이 영원불변하다면, 하나님의 6천년 경영 계획이 끝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영원불변하다는 것만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또 항상 새롭다는 것은 알고 있느냐? 그의 사역이 영원불변하다면, 그가 오늘날까지 인류를 이끌어 올 수 있었겠느냐? 그가 영원불변한 하나님인데, 왜 이미 두 시대의 사역을 하였겠느냐? 그의 사역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의 성품을 점차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인데, 나타내는 것은 모두 그의 고유한 성품이다. 처음에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에게 감춰진 것이었고, 그가 지금까지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않아 사람은 그를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역사로 사람에게 자신의 성품을 점차적으로 나타내는데, 이렇게 역사한다고 하여 시대마다 성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임없이 바뀐다고 하여 하나님의 성품도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역하는 시대가 다름으로 인해 하나님이 자신의 고유한 모든 성품을 점차적으로 사람에게 나타내어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에게 원래 특정된 성품이 없었다고는 증명할 수 없다. 시대가 다름에 따라 하나님의 성품도 점차적으로 바뀐다는 것은 그릇된 터득이다. 하나님은 고유한 특정된 성품, 곧 자신의 소시를 사람에게 나타내는데, 시대가 다름에 따라 나타내는 것이지, 한 시대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발표해 내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항상 새롭다’는 이 말은 하나님의 사역을 놓고 말한 것이고, ‘하나님이 영원불변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고유한 소유소시를 놓고 말한 것이다. 어쨌든 너는 6천년의 사역을 어느 부분에 지정해 놓거나 한 마디 고정된 말에 못 박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람이 우매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은 한 시대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마치 하나님의 이름은 영원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대체할 수 없고, 하나님이 또 예수의 이름으로도 역사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고 있는 상징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고 사탄이 될 수 없으며, 사탄은 영원히 사탄이고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기묘,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위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는 영원불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고 끊임없이 심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항상 새롭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게 되고, 시대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하게 되며, 시대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신의 새로운 뜻과 새로운 성품을 보게 한다. 새 시대에 사람이 새로운 성품의 발표를 보지 못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영원히 십자가에 못 박아 놓지 않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냐? 가령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 단지 남성이기만 하면 사람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규정하고 남자의 하나님으로 정할 것이며, 여자의 하나님이라고는 전혀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될 때면 남자는 하나님의 성별이 남자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남자의 머리가 될 것인데, 여자는 또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자신과 같은 남자만 구원할 것인데, 그럼 여자는 구원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할 때는 아담도 만들고 하와도 만들었다. 하나님은 아담만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하나님은 남자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여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말세에 하나님은 한 단계 새로운 사역을 하여 더 많은 성품을 나타내려고 하는데, 예수 때의 그런 긍휼과 자비가 아니다. 또 새로운 사역이 있게 된 이상, 이 새로운 사역이 새로운 성품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만약 성육신되지 않고 영이 역사하면서 직접 천둥소리로 말씀한다면 사람은 다 하나님과 접촉할 수 없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단지 영의 역사만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성육신으로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나고 육신으로 그의 모든 성품을 발표해야만 사람이 직접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형상을 지니고 확실히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기에 사람은 모두 실제적으로 그의 성품을 접촉하고 그의 소유소시(所有所是)를 접촉하게 된다. 이래야만 사람이 진실로 그를 알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남자의 하나님이자 여자의 하나님이기도 하다”라는 이 사역도 완성하게 되고, 하나님 성육신의 전체 사역도 성취하게 된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중복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 지금이 말세인 이상, 하나님은 말세의 사역을 하고 말세에 나타낼 자신의 모든 성품을 나타내려고 한다. 말세라고 하면 또 다른 시대이다. 예수는 너희가 그때 반드시 재앙을 겪게 되고, 반드시 지진과 기근, 온역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때라고 하면 더 이상 낡은 은혜시대가 아니라 다른 시대임을 말하는 것이다. 가령 사람의 말처럼, 하나님은 영원불변한 분이고 하나님의 성품은 영원히 긍휼과 자비이며, 사람을 자신의 몸같이 사랑하여 어떤 사람이든 다 구원하며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역이 끝날 수 있겠느냐?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모든 죄인을 위해 희생하고 자신을 제단에 바침으로 이미 구속 사역을 완성하였다. 예수가 이미 은혜시대를 끝마쳤는데, 말세에 또다시 은혜시대의 사역을 한다면 무슨 의의가 있겠느냐? 계속 그렇게 한다면 예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 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이번에 와서 십자가의 사역을 하지 않지만 여전히 긍휼과 자비를 베푼다면, 그가 시대를 끝마칠 수 있겠느냐? 긍휼과 자비만 베푸는 하나님이 시대를 끝마칠 수 있겠느냐? 시대를 끝마치는 마지막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형벌과 심판인데, 모든 불의를 드러내어 만민을 공개적으로 심판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케 한다. 이런 성품이어야 시대를 끝마칠 수 있다. 이미 말세가 되어 만물은 각기 종류대로 나뉘는데, 모두 각기 다른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른 부류로 구분된다. 이때는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과 귀착지를 드러내는 때이다. 사람이 형벌과 심판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패역과 불의는 다 드러날 수 없다. 오직 형벌과 심판을 통해야만 만물의 결말을 다 드러낼 수 있다. 사람은 형벌과 심판 속에서만이 본색이 드러나게 되어 악한 자는 악한 것에, 선한 자는 선한 것에 속하게 되므로 다 각기 부류대로 나뉘는 것이다. 형벌과 심판으로 만물의 결말을 드러내어 상선벌악(賞善罰惡)하고, 만민을 모두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귀복시킨다. 이런 사역은 모두 공의로운 형벌과 심판으로 도달해야 한다. 사람이 극도로 패괴되었고 사람의 패역 또한 너무나 심하기에, 오직 형벌과 심판을 위주로 하는, 말세에 나타낸 하나님의 공의 성품만이 사람을 철저히 변화시키고 온전케 할 수 있으며 악을 드러낼 수 있는데, 이것으로 모든 불의한 자들을 크게 징벌한다. 그러므로 이런 성품은 다 시대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성품을 나타내고 공개하는 것은 각 새 시대의 사역을 위한 것이지, 의의 없이 마음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결말을 드러내는 말세에도 여전히 사람에게 끝없는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사랑해 주고, 공의로운 심판이 없이 사랑만 있고 관용해 주고 인내해 주고 사해 주며,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계속 용서만 해 주고 공의 심판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전체 경영은 언제 매듭지을 수 있겠느냐? 그런 성품으로 언제 사람을 인류의 적합한 처소로 이끌어 들어갈 수 있겠느냐? 예를 들어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는 인자한 법관이 있는데, 그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다 사랑해 주고, 어떤 사람이든 다 포용하고 사랑해 준다면, 언제 공정한 판결을 할 수 있겠느냐? 말세에 오직 공의로운 심판만이 인류를 각기 부류대로 나눌 수 있고, 사람을 더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이렇게 심판과 형벌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전체 시대를 끝마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참도를 고찰하다 [사진제공 동방번개(전능신교)]

    『각 시대, 각 단계 역사에서 나의 이름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 대표적인 의의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마다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대표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자신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존칭이고, ‘예수’는 은혜시대를 대표하는데, 은혜시대에 구속된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사람이 말세에도 구주 예수가 강림하기를 바라고, 또한 예수가 유대에 있던 그 형상을 그대로 지니고 강림하기를 바란다면, 전체 6천년 경영 계획은 구속시대에 머물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또한 말세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것이며, 시대가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주 예수’는 다만 인류를 구속하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을 하는 것이고, 내가 취한 ‘예수’, 그 이름은 단지 은혜시대의 모든 죄인을 위해 있게 된 것이지 전 인류를 끝내기 위해 있게 된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여호와ㆍ예수ㆍ메시아는 모두 나의 영을 대표하지만, 이 몇 이름은 나의 경영 계획 중의 서로 다른 시대를 대표할 뿐 나의 전부를 대표하지 않는다. 땅에 있는 사람이 부르는 나의 이름은 나의 모든 성품과 소시를 전부 다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고, 다만 서로 다른 시대에 나에 대해 다른 호칭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시대, 즉 마지막 시대가 올 때, 나의 이름 또한 바뀌게 된다. 여호와라고 칭하지 않고, 예수라고도 칭하지 않으며, 메시아라고는 더욱 칭하지 않고, 큰 능력이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칭하는데, 이 이름으로 전체 시대를 끝마친다. 나는 여호와라고 칭한 적이 있고, 사람들에게 메시아라고 불린 적도 있다. 또한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구주 예수라고 부른 적도 있다. 오늘날, 나는 더 이상 사람이 알고 있던 여호와나 예수가 아니라 말세에 다시 돌아온, 시대를 끝마치는 하나님이고, 나의 모든 성품을 만재하고 권병과 존귀와 영광을 가득 지니고 땅끝에서 일어선 하나님 자신이다. 사람은 나와 접촉한 적도 없고, 나를 안 적도 없고, 나의 성품을 안 적도 없으며, 창세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나를 본 적이 없다. 이분이 바로 말세에 사람들에게 나타났지만 또 사람들 가운데 은밀히 거하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는 아주 실제적으로 나타나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는데, 마치 뜨거운 해 같고, 또 마치 불꽃 같으며, 능력이 충만하고, 권병을 가득 지니고 있다. 나의 말에 심판받지 않을 일인일물(一人一物)은 없고, 불사름 속에서 정결케 되지 않을 일인일물은 없다. 최종에 만국은 반드시 나의 말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되고, 또한 나의 말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진다. 이런 것으로 말세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바로 다시 돌아온 구세주이고, 전 인류를 정복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보게 하고, 또한 내가 사람의 속죄제가 된 적이 있으나 말세에는 만물을 불사르는 해의 불길이 되었음을 보게 하며, 또한 만물을 드러내는 공의로운 해라는 것도 보게 한다. 이것이 내가 말세에 하는 사역이다. 내가 이 이름을 취하고 또 이런 성품을 지닌 까닭은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뜨거운 해이자 불꽃임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고, 나, 유일한 참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나의 본래 모습, 즉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만이 아니고 구속주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창해 속의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임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구주’는 이미 ‘흰 구름’을 타고 돌아왔다>에서 발췌

    『지금 하는 사역은 은혜시대의 사역이 앞으로 진행되어 온 것이고, 또한 전체 6천년 경영 계획 사역이 앞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비록 은혜시대는 끝났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며 깊어졌다. 왜 이 단계 사역을 은혜시대와 율법시대의 기초에서 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하겠는가? 말하자면, 오늘의 사역은 은혜시대 사역의 계속이자 율법시대 사역보다 높아진 것이다. 3단계 사역은 모두 밀접히 연결되어 고리에 고리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왜 또 이 단계 사역을 예수의 그 단계 사역의 기초에서 한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예수의 그 단계 역사의 기초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단계에 또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고, 또 앞 단계의 구속 사역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의의가 없다. 그러므로 사역이 철저히 끝난 것이 아니라 시대가 앞으로 나아간 것이고, 이전의 사역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단계 사역은 율법시대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자 예수가 한 사역의 반석 위에 세워진 것으로, 한 단계 한 단계 세워진 것이지 이 단계 사역이 따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3단계 사역을 종합해야 6천년 경영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단계 사역은 은혜시대 사역의 기초에서 하는 것이다. 이 두 단계 사역이 관계가 없다면, 이 단계에 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는가? 왜 사람의 죄를 담당하지 않는가? 성령으로 잉태되지도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의 죄를 담당하지도 않고 직접 사람을 형벌하는데, 만일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사람을 형벌하는 사역을 하거나 또 현재에 와서 성령으로 잉태되지도 않는다면 사람을 형벌할 자격이 없겠지만, 나는 예수와 하나이기 때문에 직접 사람을 형벌하고 심판하는 것이다. 이 단계 사역은 모두 이전 단계 사역의 기초에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역이어야 사람을 조금씩 구원할 수 있다. 예수와 나는 하나의 영에서 왔다. 비록 육신은 관계가 없지만 영은 하나이다. 역사한 내용이 다르고 담당한 사역도 다르지만 실질은 같다. 육신이 취한 형상이 다른 것은 시대가 같지 않음으로 인해, 사역의 필요로 인해 다른 것이다. 직분이 다르므로 가져온 사역도 다르고 사람에게 나타낸 성품도 다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늘 본 것과 터득한 것은 이전과 다른데, 이것은 모두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있게 된 것이다. 비록 그들 육신의 성별은 전혀 다르고 형상도 다르며, 같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더욱이 동일한 시기에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영은 하나이다. 비록 그들의 육신은 어떤 혈통 관계나 육체 관계도 없지만, 이런 것으로는 그들이 서로 다른 두 시기의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전혀 같은 혈통이 아니고 인류의 공통된 언어도 없다(한 사람은 유대어를 하는 남성이고, 한 사람은 중국어만 하는 여성이다).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 다른 국가에 분포되어 서로 다른 시기에 각자가 해야 할 사역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하나의 영, 즉 같은 실질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들 육신의 외형은 비슷한 데가 전혀 없으며, 단지 같은 인성이 있을 뿐, 육신의 생김새나 출생은 전혀 다르다. 이런 것은 각자의 사역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사람이 그들을 인식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쨌든 하나의 영이기에 아무도 그들을 떼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혈연관계는 없지만, 그들의 영이 그들의 온 몸과 마음을 지배하여 서로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사역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게다가 그들의 육신도 전혀 같은 혈통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이 예수의 영의 아버지가 아니듯이, 또한 예수의 영이 전혀 여호와의 영의 아들이 아니듯이, 그들은 하나의 영이다. 마치 오늘날 성육신한 하나님과 예수가 혈통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으나 그들은 본래 하나인 것과 같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영이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두 차례의 성육신으로 성육신의 의의를 완전케 하였다>에서 발췌......더보기

     

    ─────────

    ①평소와 완전히 다르게[一反常態]: 갑자기 평소의 태도를 바꿈. 여기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나 관점이 바뀜을 가리킴.

    ②비미은장(卑微隱藏):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

    ③근심 걱정 없이[高枕無憂]: 여기서는 사람이 하나님이 하는 사역에 대해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안중에 두지 않음을 가리킨다.

    ④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⑤귀복(歸服): 돌아와 복종함.

    ⑥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댓글

Designed by Tistory.